하이큐!2014. 12. 2. 23:14


우시오이 미래날조.
우시>>>오이.
이와이즈미 사망네타 주의, 오이카와 부상네타 주의. 암울함.
카게야마 미래날조 나옵니다. 카게야마 많이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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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나타날때마다 마음속의 동요를 억누른다.
더이상 오지 않겠다는 종언을 기다리고, 또 각오하며, 그 입술이 열리고 말하기를 주저하는 기색이 있는지를 살피지만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그 입술은 열리는 일 없이 그저 다가와서 호흡을 약간 방해할 뿐이었다.
그리고 몇 초 후에 건네오는 말은 타성에 젖은 위선자의 말. 잘 있었나, 약은 먹었나, 몸은 좀 어떤가, 등등. 대답할 가치가 없지만 자신 또한 타성에 젖어서 대답한다. 무성의하게, 최소한의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는 약속이나 한 듯 침대로 가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지 않을 때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거나 물을 끓여서 머그잔에 차를 태우고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신다. 카페인이 없는 허브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맛도 향도 없는것을 천천히 마시는 우시지마에게, 오이카와는 시선을 두지 않는다.
주고받을 대화는 아무것도 없다. 침묵 대신 바보같이 시끄러운 버라이어티 방송을 선택하지만, 그조차도 이내 질려버린다.

오이카와는 이 남자에게 묻고싶은게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시합을 뛴다든지, 인터뷰가 방송에 나온다든지로 싫어도 접하지만 즉시 채널을 돌림으로서 정보를 거절했다. 우시지마는 자기 이야기를 떠벌리는 남자가 아니었지만, 오이카와가 무언가를 물으면 아마 답을 해 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실하게.

그래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변하는 것을, 아니면 우시지마가 변하는 것을.
예를 들면, 결혼하게 되어서 더이상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그런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럴것이라고, 가까운 시일은 아니라도 이 관계가 십년넘게 이어지지 않을거라고. 우시지마는 자신이 받는 만큼의 돈과 관심을 가족과 대중 앞에 보여야 하고, 집안에서는 결혼을 부추길것이다.
언제까지 자신에게 집착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가 오면, 그러면.....

그 때가 우시지마의 입으로 고해지는 날을, 오이카와는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주고받을 단어 없이 넓은 화면만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간조차 쓰레기 이외의 가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먼저 일어나서 침실에 들어갔다. 오른쪽 어깨에 닿지 않게 몸을 눕히고 천장을 멍하게 올려다 본다. 우시지마는 먼저 샤워를 할 생각인지, TV가 꺼진 거실을 통해 물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점심에 주변을 한바퀴 돌고 들어와서 약간의 근력 운동을 하고, 쓰레기를 분리수거해서 버린 다음 편의점에 갔다와서 샤워를 했다. 우시지마가 오지 않았다면 그저 그렇게 잠들었을 하루가, 또 한번 더 샤워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안겨준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듯 숨을 고른다. 얼마 안 있어 깨어나겠지만, 하기에 앞서 감히 잠들려고 했다는 어이없음을 우시지마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이토록 물어뜯고 핥는것일까. 호흡을 가다듬느라 들썩거리는 가슴위의 근육에 잇자국이 몇번이고 새겨진다. 오이카와는 시트를 움켜쥐고, 우시지마의 뒤로 보이는 천장에 집중했다. 흔들거리고, 점멸한다. 들어올때 불을 끄고 들어오면 좋았을건데, 하염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니 눈이 부셨다. 그렇다고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더 싫은 기분이 들었다. 눈살을 한껏 찌푸리고 빛을 적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때 한번 더 박차를 가하는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떠버린다.
벌어진 입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탁 놓는 숨소리만 거칠게 반복하고, 몸이 점점 위로 쳐올라가는게 빨라져서 미끄러질것 같아 불편함은 가중되었다. 허벅지 양쪽이 붙잡혀 있으니 그야 풀려나진 않겠지만, 불안했다. 베개에 목까지 파묻혀서, 침대 머리에 머리끝이 닿을것처럼 계속해서 처박혀갔다.
그만, 하고 말하지만 늘 그렇듯이 들어먹을 귀는 가지고 있지 않나보다. 오른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리지 못하는 지금의 오이카와로선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는것도 버거웠다.
대체 언제 끝나는걸까, 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는, 언제까지 사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을것인가. 살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시트를 움켜쥐다가 미끄러진 왼손이 거칠게 밀려오는 육체를 가로막는다. 원래도 이길 수 없었지만, 한번 버릴려 했던 자신의 몸과 이제는 비교도 안될만큼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상반신이 피부 위로 느껴진다.

뜨거웠다.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뜨거운 생명이 자신의 몸과 이어져서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이 과정에서 언젠가 벗어나는 그 날을 그저 기다리며, 눈꺼풀을 완전히 닫은 후 자신의 손을 맞잡는 우시지마의 뜨거운 손을 끌어당겨서 얼굴에 접촉시켰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유일하게 갈구하는 것은, 그 손의 온도 뿐이었다.


"오이카와, 이게 뭐지?"

비척비척 샤워를 하고 침대로 돌아온 오이카와 앞에, 우시지마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서랍속에 처박아 두었을 플라스틱 병이 뚜껑이 열려서 침대 위에 나뒹굴고 있는걸 보고, 오이카와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병원에서, 받은 거."
"이건 아무 표시도 없는것인데."

우시지마가 손바닥 위에 올려둔 것은 하얀 알약이었다. 일부러 눈에 안 띄게 넣어둔 걸 자기 멋대로 뒤져서 찾아낸 그 행동에 오이카와는 약간 짜증이 밀려오는걸 느꼈다.

"따로 받은거야. 잠 안오면 먹는거."
"불면증이라도 있나?"
"가끔."
"왜 말 안했지?"

집요하다. 너에 대한걸 전부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저 말투가 나오면 대화가 길어진다는 건 경험상 짐작할 수 있었다.

"따뜻한 우유 마시고 반신욕 하면 잠 잘 오거든. 그건 혹시 몰라서 그냥 받아둔거야. 그런거까지 말할 필요가 있어?"
"말 해. 어떤 거라도. 전부."
"................"

오이카와는 입을 앙다물고 우시지마 옆을 지나쳐서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얘기가 길어지는건 사양하고 싶었다. 머리 위까지 덮어 쓴 이불 틈새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을 다시 확인해보고 있는것일까. 말한 대로 잘 챙겨먹는지? 자신이 모르는 증세가 나타난건 아닌지? 잠시 뒤에야, 불이 꺼지고 침대에 육중한 무게가 올라와서 흔들거렸다. 오이카와는 허공을 깜박거렸다. 나른하고, 오늘은 빨리 자고 싶을 뿐이었다.

"일주일정도 못올거 같아."

그런 말을 들은 듯하다.
눈을 감았다.




우시지마가 찾아오지 않은 밤에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가볍게 로드워킹을 하곤 했다. 사람이 드문 길을 그다지 빠르지 않운 속도로 달리고, 그저 달렸다.
차가운 공기에 닿는 코끝과 그것을 마신 기도가 따갑다. 그렇지만 어지간해서는 매일, 시간대에 상관 없이 달리는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우시지마가 몸에 새겨넣은 교육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하지 않기위해 속도를 높이다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떠올라 있었다.
멈춰서 숨을 고르는 오이카와 뒤로 자전거를 탄 학생 몇명이 지나간다. 샐러리맨도 출근을 한다. 우시지마는 뭔 일인지 몰라도 일주일동안 바쁘게 지낸다. 그 모든 일상 속에 오이카와는 혼자 멈춰있었다.

-대체, 무슨 의미를 가져야 하는걸까.

그의 죽음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의 불행 이상의 충격을 오이카와에게 주고, 더 큰것을 가져가 버렸다. 오이카와의 삶의 대부분을 통째로 도려내버린듯 날아가버린 공백은 계속해서 함정처럼 발밑에 도사리고 언제 빠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 없었던 일상을 칼로 잘라내서 그 뒤의 악몽을 접붙인것처럼 살고있는 지금의 오이카와에게는 불면증 같은건 사치였다. 하염없이 가라앉는 그 공백에 더이상 빠져들어가지 못하도록 팔다리에 못을 박는 것이 우시지마의 손이라면, 그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누구의 손일까. 차갑고 차가웠던, 굳어있던 그 손은.

-오이카와.

"...아."

어느새 멍하게 서있는 자기를 주변에서 흘금거리는 것을 깨닫고, 오이카와는 코를 한번 훌쩍거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집에 두고 온 약을 생각했다.
우시지마에게 수면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병원에서 받아온 약이 아니었다.
정말로 우연히 구하게 된, 말 그대로의 '약'이었다. 우울하고 기운이 없을때 기분을 좋게 해준다며 누군가가 구해준 그 약을, 먹지도 않고 그저 보관만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처럼 몸을 다친 선수나 사고를 겪은 연예인들이 복용한다고 하는, 찾아보지 않아도 별로 좋은 약은 아니라는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한알로 이 미칠듯한 기분을 잠재울수 있다니. 그런 좋은것을 어째서 병원에서 내주지 않는걸까? 그래서 방구석에 처박아 뒀다. 우시지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것은,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에서였다.

-오이카와, 내일.....

"아니,아니야."

도망치고 있는것이 아닐까. 직시하고 싶지 않은 어떤것에서.
두려웠다. 그날 죽어버리지 않은 것을 더이상 견달수 없어지는 그 날이. 그것이 우시지마라는 감옥안에 있을 때일지, 아니면 풀려난 뒤일지 그것도 두려웠다.
혐오뿐이라 해도 결국은 그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화가 났을땐 지독한 처사를 당할지언정 오이카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주시하고 이상을 알아채려 하고있는 그 의지는 가볍게 볼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시지마는 결국 타인이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그러했듯 지독하게 둔감했다.

-오이카와, 내일 어쩌면.....

머릿속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이 목소리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싶지 않은게 사실이었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가 대체 무엇을 전하고 싶어하는지, 그 뒤를 들을 수가 없었다.
도망치기 위해 달리던 그 끝은 준비된 함정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인것일까.

"오이카와 선배."


오이카와는 발걸음을 멈췄다. 광장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계속 자기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오버랩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기처럼 달리는 복장을 하고 있는 기억속에 선명한 어느 후배의 얼굴이 시야에 성큼 들어왔다.

"...토비오?"
"오랜만입니다, 어, 오이카와 선배."

기억보다도 조금 낮아진 목소리. 그리고 거의 같아진 눈높이. 조금 순해진거 같은 눈매. 말 그대로 오랜만이었다. 거의 3년만의 재회였다.
토비오가 어디서 살았지? 내가 사는 곳에서 달려갈 만큼 가까운건가? 어째서 이런곳에서 마주치는걸까. 그 생각을 하는것과 동시에, 반갑지 않은 감정만 치솟아 올랐다.

"응. 오랜만이네. 그럼."

마주쳐서 반가울것도 없는 2순위의 사람에게 줄 시간은 없이 그저 지나칠려 하는 그 뒤를 카게야마가 따라붙었다.

"오이카와 선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왜? 제 갈길 가지?"
"잠깐만..."
"안부를 묻는다거나 명복을 빈다거나 둘중 하나면 안들어줄거야."

뒤도 안돌아보고 달리려 했지만, 속도를 높인 카게야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싫다고! "

어쩐지 옛날처럼 실랑이를 벌이면서, 카게야마를 피해서 갈려고 했지만 계속 붙잡혔다. 오이카와는 빨리 돌아가서 쉬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토비오, 진짜 끈질기네! 난 이제 니가 뭐하든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제발 좀 비켜줄래?"
"상관 없지 않잖아요, 저한테는...!"

가까이 다가오자, 어쩐지 자기보다 좀 더 커진거 같다는 불쾌감이 더 커졌다.

".....뭐야."
"그냥.... 얘기만 하고 싶어서 그래요."

카게야마에게 붙잡힌 팔은 들어서 뿌리치기 힘든 쪽의 팔이었다. 힘겨루기로 진 적은 없었는데, 치사하다는 생각이 찌푸린 오이카와의 얼굴을 같은 눈높이에서 직시하는 앳된 후배의 얼굴은 사뭇 긴장해 있었다.




카게야마가 사는 곳은 의외로 좋은 아파트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실업팀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었던걸 기억했지만, 어째서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보다 어째서 이녀석의 집에 자기가 발을 들이는건지, 따라와 놓고도 이상했다. 한참을 달린 만큼 목도 마르고 떨어진 체력에 힘도 들어서 쉬고 싶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카게야마의 집은 선택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거실에 들어가자 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소파 밑에 손을 넣는 카게야마를 보고 멀뚱히 서버렸다.

"...좀 나오...또 물었어!"
"토비오, 뭐하는거야?"
"고양이가..."

잠시 뒤 카게야마의 손에 말 그대로 고양이 한마리가 잡혀서 끌려나왔다. 얼룩덜룩한 주황색 무늬의 작은 새끼가 커다란 손 안에 잡혀서 심하게 하악거리고 있었고, 카게야마도 고양이를 노려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고양이는 작은 이빨로 손을 마구 물었고, 카게야마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결국 손을 놓자, 순식간에 다시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가 버린다.
좌절, 이란 단어가 그려지는 카게야마의 어깨에 오이카와는 피식 웃고말았다.

"너 여전히 동물한테 인기가 없나봐?"
"...알면서 묻지말아주세요."
"그거 키우는거?"
"애완동물로 키우면 좀 친해질거라고...."

효과는 없나보다. 오이카와는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도 일순 잊고 신나게 비웃어줬다. 덩치는 자랐어도 변함없는 부분은 많았다.

"걔 이름이 뭐야?"
"카레."
"처음부터 잘못했네, 토비오가 잘못했어."




오이카와는 고양이가 숨어있는 소파 위에 앉았고, 카게야마는 차 대신 냉장고에서 스포츠 드링크 두개를 꺼내들고 옆에 앉아서 그걸 내밀었다. 찬 공기를 마신 뒤에 차가운 음료라니, 더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에, 카게야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듣기 싫다고 하셨지만, 조의를 표합니다."
"응."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줄은..."
"응."
"......."
"........"

오이카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귀로만 위로를 들었다. 아마도 집에 틀어박히기 전에 무수리 말해졌을 진심어린 위로들은 무엇 하나 와닿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며칠 이어진 장례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 나올 수 없었다. 그 뒤로 고향 친구들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갔다. 오이카와보다 더 슬퍼할 터인 그의 부모님들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자기가 죽어야만 이 악몽이 끝날거 같아서, 그래서...

"오이카와선배."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역시 토비오는 만나는게 아니었어. 오이카와는 후회했다. 아침에 나오지 않을걸. 도중에 그만 돌아갈걸. 만났어도 모른척 할걸.

"아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카게야마가 붙잡는다.

"묻고싶은게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라면 난 대답할거 없으니까, 돌아갈래."
"오이카와 선배, 그런게 아니라 정말로,"
"놔줄래? 지금 잡고있는 팔, 아프거든."

카게야마가 앗 하는 표정으로 손을 놓는다. 그 태도가, 약한것을 조심스레 다루는 기색을 느껴버린다. 불쾌하고, 속에서 이제 잊었다고 생각했던 검은 무언가가 오랜만에 밀려올라왔다.

"어차피 관계자들한테 소문은 다 났을거고? 내 어깨, 어떻게 변한건지 궁금한거지? 보여줄까?"
"아뇨, 전 정말로.."

당황해서 일그러지는 얼굴이 우스웠다. 오이카와는 무표정으로, 걸치고 있는 트레이닝복을 벗기 시작했다. 추워서 덧입은 이너웨어 밑으로 손을 넣어서 끌어 올리자 카게야마가 저지했다.

"정말로....그런게 아니에요, 일부러 그러지 말아주세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진지한 얼굴에, 오이카와도 손을 멈췄다. 약간 머리가 식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홧김에 옷을 벗어서 보이면 아직 남아있는 흔적도 보여버린다. 그렇다고 이대로 건방진 후배의 말을 순순히 듣는것도 못마땅한 그때, 발 밑에 무언가 닿아서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

오이카와가 발치를 보자 카게야마도 덩달아서 시선을 따라간다. 거기에는, 오이카와의 발목에 이주 친근하게 몸을 비비는 작은 털뭉치가 있었다.
냐옹, 하는 애교있는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배신자."
"아기한테 무슨 험한 말 쓰는거야, 토비오쨩."
"나한테는, 한번도...."

오이카와의 손바닥 밑에서 골골거리는 고양이를 전에 없이 억울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카게야마의 진심어린 원망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덕분에 험악하게 구를뻔한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오이카와선배,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수를 쓴겁니까. 가르쳐주세요."
"싫어. 동물은 본능적으로 좋은 사람을 느낀다고 그냥."
" 그럼 왜 오이카와 선배를 따르는거죠? 말이 안돼잖아!"

어쩌겠어, 하고 웃자, 카게야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있는 얼굴이 사뭇 의외다.
생각해보면, 옛날처럼 날을 세우고 대할 필요는 없어져버렸다. 카게야마는 더이상 오이카와의 라이벌이 아니었다. 그 무대에서 오이카와는 사라져 버렸으니까.
오이카와는 자기가 다른 감정 없이 카게야마를 대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주고받은건 근황이었다. 카게야마는 은퇴한 오이카와의 근황을 물었고,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 관련된 부분만 빼고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카게야마는 실업팀에서 꾸준히 시합에 나갔고, 최근들어 혼자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경기에 관한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 어깨는, 앞으로 얼마나 더 치료해야..."
"몇년은 계속, 꾸준히. 지겨워 정말."
"....빨리 완치하길 바랄게요."

완치해도 의미가 없어,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오이카와는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응. 그럼 난 가볼게."
"벌써요?"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솔직히 오늘은 좀 무리해서 달렸고. 집에 초대해줘서 고마웠어, 토비오쨩. 오랜만에 얘기도 나눴고. 나름 재밌었어. "

현관을 나서는 오이카와의 뒤를 카게야마가 따라나선다. 마중하러 나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라고 말했지만 바래다 준다고 기어코 따라나선다.

아까보다 더 쌀쌀하게 부는 바람에 코끝이 찡해서 몸을 움츠린채 나란히 걸어가던 도중, 카게야마가 멈춰선다.

"오이카와 선배."
"응, 고마워. 그럼 안녕."
"...저, 만났어요. 그 전날에."

전날에? 오이카와는 한발짝 내딛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누굴 만나?"
"이와이즈미 선배, 만났어요. 우연히."




-어제 카게야마 만났어, 우연히.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했는데, 저한테 묻고 싶은게 있다고."


-아니,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졌어. 너보다 더 키 커진거 같더라.


"나중에 누가 물어도, 특히 오이카와 선배가 물어보면 반드시 모른척 해달라고 했어요. 당분간은 비밀로 하고싶다고."


-야, 오이카와! 이 길이 아니라고! 내려봐, 내가 운전한다. 불만이라도 있냐.


"그 뒤에, 그런 일이 일어날줄은.... 믿겨지지 않아서, 계속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도착하면 깨워줄거니까 자고 있어. 특별 서비스다. 어디 가는진 가보면 알아.
-많이 피곤하냐? 체력 보존해라, 무리하지 말고. 다치기라도 하면 확 패버린다. 내가 언제까지 너한테 이런 소리 해야하냐 진짜.


"계속...오이카와 선배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하는 말은 듣기싫어 하는거 아니까, 말해도 괜찮을지 이런거 계속 생각했지만."


-계속 같이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말야.
-취미로 계속 하는것과 일로 계속 하는건 다르지. 각자의 선택이니까.
-너 말야.


"이와이즈미 선배, 저희 실업팀의 스포츠 에이전시에 취직했다고 하셨어요. 이제 도쿄에서 일할거라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제가 속한 팀과 같은 소속이라서 금방 알게 될 거니까 대신 주변에 말하지 말아달라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면 어쩔거냐? 아니, 바보같은 소리 말고! 여자 임신시킨거 아니라고! 진지하게! 왜 그랬어? 하고 화낼만한 짓을 하면.


"왜 오이카와 선배의 팀에 가지 않았냐고 물으니까, 처음엔 힘들겠지만 일이 익숙해져서 경력이 쌓인 뒤에 정말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이직할거라고. 한번쯤 나한테 뒤통수 맞아봐야 한다고, 웃었어요. "


- 날 원망할지도 모르고, 그놈의 초절정신뢰관계를 깨버릴지도 모르는 짓을 내가 하면, 날 싫어할거냐?


"그래서, 저희 팀 일정과 숙소위치를 묻고, 다음 시즌부터 같은 팀이니까 잘 부탁한다고 웃고...... 헤어졌어요."

- 안 깨져?
- 장담할 수 있냐? 정말로?
- 아니, 곧 알게 될거야. 말 안해. 그 날이 와도 그땐 날 원망하지 마라.
- 안 한다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오이카와 선배가 알고 계셨을지 모르겠지만.......그래도, 이와이즈미 선배가 한 얘기는 전하고 싶었어요."



- 확실한건, 좀 더 자주 네 면상을 보게 될거라는거다. 솔직히 좀 지긋지긋하다, 기껏 떨어져서 살아가나 했더니.

-나도 포기할줄을 모르니까, 너보다 더.


"이와이즈미 선배는, 오이카와 선배와 같이....."


-각오하고 있어라, 오이카와.






-오이카와.










"이와쨩."



처음부터 발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급속도로 주변이 어두워져 갔다. 이곳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의미가 없다는걸 깨닫는다. 처음부터 서 있질 않았으니까.
숨을 쉬고 있었던가? 호흡이 가빠졌다. 그동안 살아있다고 착각했던 것 뿐이었다.


-왜, 나만 혼자 남아있는거지?

이상했다. 이상하잖아. 여기 있을게 아니잖아.
어디로 가야하지?

-아.

손이 보인다. 익숙한 손. 어릴때부터 옆에 있었더, 거칠지만 따뜻한 손.

주저 없이 그 손을 잡는다.





얼음을 베어 만든 듯, 차가웠다.


"오이카와 선배!!!!!"


차가운 길바닥 위에, 카게야마가 내지르는 소리가 닿기 직전에 오이카와의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Posted by 후타리